지금까지는 풀코스만 뛰어도 주변에서는 이야기정도는 할 수 있고, 42킬로미터쯤 뛴다고 죽지는 않으니
취미생활 겸 건강진단 삼아 일년에 두세번쯤 풀코스를 뛰는 것이 좋았다.
그리고 울트라 마라톤은 풀코스보다 더 긴 거리를 달리니 특이한 매력이 있겠으나 그 재미는
좀더 나이가 든 후에 맛을 봐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아껴 두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들이 모두 울트라 마라톤을 뛰어도 나는 지금까지 꾹 참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전주울트라 코스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나서는 생각이 약간 달라졌다.
전주울트라 코스가 나의 옛날 추억을 더듬을 수 있는 기막힌 곳을 지나는 코스였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약30여년전 군에 입대하여 첫 훈련을 받던 곳이 전북 익산군 여산면의
제2하사관학교이고 하사관훈련의 마지막 코스가 유격훈련으로서, 학교에서 약100리정도
떨어진 완주군 고산면 대아리에 있는 유격장이었다. 대아리에는 일제때 건설된 규모가
굉장히 큰 대아리 저수지가 그 웅장한 자태와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고 저수지를 내려다
보는 산중턱에 막사를 지어 숙식을 하고, 주변의 숲속 훈련장에서 소위 쪼구려뛰기, 꼬라박기,
기타 벼라별 훈련을 받으면서 부르는 노래가 훈련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부모님 은혜,
고향의 봄 등이다.
그러니 땀과 눈물, 흙먼지 등이 뒤범벅이 되어 구르고 뒹굴고 온 몸이 나긋나긋할 정도로 되어야
훈련이 끝나고 막사로 돌아와 야간 휴식을 취하는게 일과였다. 그러나 훈련받던 때 가끔씩
내려다 보는 그 저수지는 얼마나 포근하고 정겹던지 제대후에도 고산의 광경이 문득문득 떠올랐다.
언젠가 꼭 한번은 가서 보리라 생각해 보지만 그렇게 쉽게 이루어 지지 않다가 이번에
대회도 참가하고 그곳도 둘러보자는 얕은 속셈으로 이번 대회를 결심하였다.
또하나 그간 오랫동안 근무하던 부천을 떠나 강남쪽에 새로운 둥지를 트고 새 생활을 시작하던 참이라
하룻밤새 달리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해 보고싶은 욕심도 있었다.
대회 당일 아침 긴장된 탓인지 새벽에 일찍 깨어 약간의 수면부족을 느꼈으나 별 도리가 없다.
영등포역에서 기차로 전주역까지 가고 택시로 갈아타고 대회장인 전주종합운동장으로 갔다.
대회장에서 같이간 서경석님, 황선윤님, 현병인님 등과 추어탕으로 저녁을 든든히 먹고 출발선에 선다.
다른 분들이야 경험이 많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연습량이 많으니 걱정이 되지 않겠지만 연습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나는 불안감이 앞선다. 그래 가다 못가면 회수차 타고 오자.
그리고 가는데까지만 가보자 하는 심정으로 19:00에 무리와 같이 출발한다.
체질적으로 땀이 많은지라 출발때부터 땀이 흐른다. 시작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무리가 빨리 달려
따라 가기가 힘이 든다. 그래도 무리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불안한 마음에 같은 속도로 따라 붙어
무리를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쓴다.
시가지를 벗어나니 시원히 트인 들녘으로 논밭이 보이고 도로 옆에는 딸기 파는 가게들이 성업중이다.
21:52분쯤 25킬로지점에 가니 현대차마라톤클럽에서 쵸코파이와 음료수 꿀차등을 공급하는데 배가
그렇게 고프지는 않았지만 다음을 위해 가능한한 많이 먹고 마시고서 황선윤님과 같이 출발한다.
출발전에 전화로 확인하니 조영형님은 약간 뒤쪽에서 오고 있단다.
물론 서경석님과 현병인님은 이미 10킬로 이상 앞서 갔겠지만.
30킬로를 지나고 백제예술대학을 오르는 곳에는 약간의 언덕으로 되어 있어 대부분 걷는다.
이미 황선윤님은 먼저 치고 나가고 없지만 그가 챙겨준 비닐 봉지속의 과일을 꺼내 먹으면서
나도 걷는 대열에 합류한다.
그런데 그 과일이 어찌나 맛있던지 다음을 위하여 절반만 먹고 도로 가방 옆주머니에 보관한다.
기운이 난다. 황형 고맙소 하고 마음 속으로 인사한다.
40킬로 지점에서 언뜻 시계를 보니 4시간 40분이 경과되었다. 이정도 속도가 좋은 건지 아닌지
누구 말대로 초자가 되다보니 판단이 안선다. 시골길을 지나다 보니 오른쪽은 넓은 시냇가이고
개울 뚝방길을 달리고 있다. 깜깜하니 여기저기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제 몸도 정신도 지쳤나 보다. 내가 이 한밤중에 왜 이런 짓을 하나 생각하며 가방에서
달콤한 연양갱을 꺼내어 먹으면서 천천히 걸어가 본다. 기대했던 달과 별도 보이지 않는다.
23:40분경 앞쪽이 야시장같이 시끌벅적하고 밝은 불빛도 보인다.
아 저곳이 42킬로 지점의 휴게소인가 보다. 힘을 내어 달려가 보니 전주마라톤클럽에서
오뎅국물을 안겨주는 것이 아닌가? 뜻뜻한 국물을 두 그릇 마시고 나니 살 것같다.
지금까지는 풀코스 거리이니 이제부터 달리는 거리는 내 평생 새로 달려보는 긴 거리가 아니겠는가.
새로운 기록을 작성하는 거야. 몸을 추스리고 출발을 하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상황이 어떠한가 집에서 확인하는 전화다. 전주회원에게 대아리 저수지 위치를 물어보니
쭉 가면 나온단다. 나도 그 정도는 아는데…. 어쨌든 가자!
평지를 따라 쭉 달리다 보니 드디어 “대아”란 간판이 주위에 보이는 것이 이제 대아리에
거의 왔다는 느낌이 온다. 그런데 그 순간 나타나는 오르막은 무슨 심술인가?
다들 걷는데 나도 따라 걸었다. 그런데 걷는 것도 급수가 있나.
어떻게 그리 빨리 걸어 오르는지 부럽다. 그래 급하면 먼저들 가시오.
한참을 걸어 올라 꼭대기에 오르니 대아리 저수지가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곳이 지도상 50킬로 지점쯤 될 것이다.
고갯마루에서는 아래로 내리막길이 되어 있어 급하게 달려간다. 그래 이제는 주변도 좀 살펴야지.
배낭에 묶어두었던 후래쉬를 손에 들고 왼쪽의 산과 오른쪽의 저수지를 비추어 본다.
잠시 뛰어 가니 왼쪽 산언덕에 밝은 불빛이 보이고 차단기가 보이는데
아! 저곳이 옛날 유격훈련 받던 때 묵었던 막사로구나.
올라가 보고 싶은 유혹을 떨쳐 버리고 가방에서 준비해간 VOICE RECORDER를 꺼내어 녹음을 한다.
"어 아직도 하사관학교 유격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지금시간 일요일 새벽 01:02분!”
(지금은 부사관학교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주변의 주의 표지판을 보고 알았다).
나는 감격에 겨워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나의 감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무런 미련도 없이 그 곳을 후다닥 지나간다. 아 한심한 사람들아.
내가 왜 그러고 있는지 물어보고나 가지. 다른 사람들의 수준이 낮으니(?) 에이 할 수 없다. 나도 가자.
칠흑같이 어두운 저수지 길을 뛰면서 보니 저하늘의 별들이 가물가물 보인다.
오늘이 흐린 날인지 초롱초롱한 별빛이 아니다.
별이 보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삼는다. 이제 발바닥도 아프고 모든 것이 귀찮아 진다.
뛰는 건지 걷는 건지 속도가 영 말이 아니다.
반환지점이 있는지 돌아 나오는 주자들이 보인다. 아 얼마나 부러운지. 제1CP 가까이 갔을 때
스쳐 지나가는 황선윤님을 만나니 반갑고 부럽고.
드디어 체크포인트에 도달하니 배번호를 보고 기록을 체크한다.
제1CP(59.5km) 제한시간(8시간30분)보다는 약 한시간 정도 일찍 도착한 것 같다.
미역국물에 밥을 말아먹고 양말도 벗고 배낭을 베게삼아 누워서 휴식을 취해본다.
이곳에서 포기하고 버스로 간다는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나도 그 유혹에 빠져 보고 싶은
위험한 생각이 간절하다. 아 그래서 중도 포기하는구나.
벌떡 일어나 양말을 신고 군장을 챙겨본다. 누가 대신 뛰어줄 것도 아닌데 가자.
누워 쉬다 나오니 바깥 공기가 장난이 아니게 춥다.
배낭에서 바람막이 겉옷을 꺼내어 입고 빵모자까지 쓰고 나니 훨씬 낫다.
70킬로 지점 밤티재가 길을 가로 막는다. 모두 걷네. 나도 걷는다.
새벽 3~4시는 된 시각이니 슬슬 졸음이 온다. 이제는 시계 보는 일도 귀찮고 무의미한 것 같다.
졸음에 겨워 이리 비틀 저리 비틀하며 재를 오르니 능률이 전혀 오르지 않는다.
구렁텅이에 꼬꾸라 지는 사고나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
73.6킬로 밤티재 정상 휴게소에서 신발에 들어간 왕모래를 털어 내고 내리막길을 달려 본다.
그래도 내리막은 달릴만 하다. 내리막길이 끝나는 데 하늘이 희뿌옇게 날이 밝아온다.
이제는 몇 몇 사람들과 계속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것이 배번에 씌어진 이름을 보고 알 수 있다.
83.5킬로 명덕초교에서 정읍마라톤클럽 자원봉사자들에게서 땅콩차를 한잔 얻어 마시고 출발한다.
아 그런데 이게 뭐야. 약1킬로 구간이 도로 포장작업 중으로 자잘한 자갈길이 이어져 있지 않은가.
안 그래도 지친 나그네를 더 지치게 하누만.
벌써 해는 떠서 오르는데 갈길은 멀고 한심하다. 90킬로 지점에서 골인시 사진 복장 때문에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어 집어 넣고 뛰어 보지만 속도가 나지 않는다.
초포다리를 지나고 나니 이제 전주시내에 들어 왔는지 차량도 많고 상가들도 문을 열고 있다.
95킬로 지점을 지나 골인지점으로 가는데 서경석님이 마중을 나오시더니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14시간 안에 들어갈 수 있단다. 본인도 100킬로를 뛰고 나서 괴로울텐데 마중까지 나오시고 동
반주까지 해 주시니 이 고마움을 어찌 말로 표현하겠는가?
보조를 맞추어 조금씩 속도를 올려 남은 거리를 달려 전주종합운동장 트랙을 한바퀴 돌아 골인!
나만을 위한 테이프를 가슴으로 끊고 들어간다.
전광 시계를 보니 아직 13시간대를 가리키고 있다.(총주행시간 13시간 57분)
밤새 100킬로 250리길을 달려 왔다. 그 느낌은 참으로 굉장하구나.
일년에 한두번은 할 만한 일이지만 너무 자주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 미비사항
-신발은 밑창이 약간 두터운 것이 좋단다.
-바세린을 마찰이 있는 곳에 충분히 바르자
-랜턴/보이스레코더 등은 어깨끈에 부착이 되는 것이 좋겠다
-전날 잠을 충분히 자고 휴식을 취하여 평온한 마음으로 출발
* 행사가 끝나고
1. 전주에서 제일 유명한 한정식집(100번집)에서 과하주, 이강주, 전주막걸리등으로
배를 채우고 뜨뜻한 방바닥에서 뒹굴다 왔다
2. 신정동에서 순대국 시켜 놓고 전주에서 메고 온 막걸리 약 10병을 전부 해 치우고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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